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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부형의원 신냉전 속에서 한국의 선택모색 이 글을 실수로 잃고 세번째 쓴다.기억을 더듬어 또 쓰는데 먼저 글 읽으신 분들께 어떻게 읽힐지

동진대성 2020. 12. 15.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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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냉전 속에서 한국의 선택모색

이 글을 실수로 잃고 세번째 쓴다.기억을 더듬어 또
쓰는데 먼저 글 읽으신 분들께 어떻게 읽힐지 걱정
된다.

1917년 제1차세계대전이 끝나기 전야에 세계사를
뒤흔들 사건이 일어났다. 농노제국 러시아에서 일
어난 사회주의 혁명이다. 자본주의와 제국주의가
높은 단계로 발전한 유럽이 아닌 후진국 러시아에
서 일어난 혁명이 소비어트연방공화국 정권으로
모습을 드러내자 유럽과 미국.신흥 동아시아의제국
일본에서는 두려움과 경계 그리고 적대의 분위기가
가득했다. 그러나 구미와 일제의 식민제국주의에
시달리던 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중남미의 식민지에
서는 자신들을 해방시킬 구원의 불빛이 떠올랐다고
환호했다. 식민본국의 지식인들과 노동대중들도
러시아혁명에 환호했다.

미국과 영국의 도움으로 청일, 러일전쟁에서 이긴
일젝군국주의는 한반도를 병합한 뒤, 중국대륙 침
략의 징검다리로 이용했다. 미영과 결합했던 일제
는 1차대전의 승전국에 편승하여 동아시아의 패권
을 넘보기 시작했다. 미국과 유럽의 식민제국들은
자신들의 식민지에서 일어나는 민족해방운동과
자기네 본국의 노동자 농민 지식인들의 노동해방
운동을 저지하기에도 힘겨워 점차 한반도와 중국
에서의 일제 우월적 지위를 방임하지않을 수 없게
되었다. 우리 한반도 주민은 동북아 귀퉁이에 큰
나라들에 둘러쌓에 시달리다가 우리보다 먼저 구미
문명을 받아 명치유신에 성공한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국내 항일운동이 일제의 촘촘한 그믈망에
견디지 못하여 중국으로 미국 유럽으로, 특히 소련
으로 흐터져 조국해방의 가시밭길을 걸으면서 새로
운 내일을 모색하고 실천했다. 세계는 넓고 우리 민
족을 해방할 길도 많다는 견문도 넓혔을 긧이다.

1차세계대전과 2자대전의 중간시대는 자본주의
세력의 주도권이 압도적 생산력을 지닌 미국으로
넘어간 시기이기도했다. 미국은 영불 식민제국들
을 도와 독일제국을 패배시킨 은인이 되었다.
그 시대는 유럽식민지 본국과 식민지에서 노동자
해방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이 분출한 시기이기도
했다. 구미와 식민지의 노동자-민족해방운동은 같
은 인간해방운동으로 나아가는 단결을 모색하고
연대를 해나갔다. 여기서 상해에 모여든 아시아
아프리카 인도 특히 한반도의 민족해방 운동가
들과 중국의 운동가들이 함께 모색한 세계의 내일
은 깊은 영향을 미쳤다. 비교적 자유스런 프랑스
파리에서도 비슷한 체험을 나눈 그룹들도 있었다.
그러나 어느곳보다 한반도에 큰 영향을 미친 그룹
은 사회주의 본산 소련에서 새로운 이론과 실천훈
련을 연마한 그룹과 만주에서의 무장항일 세럭이
었다. 또한 미국에서 대의민주주의와 자유시장
경제운용을 공부한 그룹도 큰 영향을 미쳤다.

제2차대전은 전쟁의 참화와 고통, 파괴와 악착스
런 인명살상에서도 지난 시대에 유례가 없었지만
한반도와 다른 식민지 민족해방세력에게는 해방의
큰 기쁨을 기다리는 인고의 시기였다. 그들의 예상
대로 아시아, 아프리카 중동 등 다수 식민지들은
민족해방을 맞았다. 영국 프랑스와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네델란드 등 1,2차 대전을 치른 식민제국들은 민족해방을 막을 기력을 쇠진했다.
대부분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의 영향력이 지배했
던 전후 시대는 승전국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자
본주의, 자유민주주의 세력과 소련방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해방세력으로 나눠었다. 식민지 해방운
동에도 사회주의 세력이 주류가 아닌 경우도 있었
다.

유럽에서 독일 이탈리아 추축국 패전으로 전쟁이
끝나자 동유럽은 독일의 분단이 상징하듯 소련방
영항권으로 편입되었다. 철저히 파괴된 영국 프랑
스 독일 등은 미국에게 생존을 맡겼다. 소련의 공
산주의 팽창을 막기 위해 북대서양군사조약기구
나토를 구성하고 사령관을 미군으로 맞아드렸다.
경제부흥을 미국이 주도하는 마샬플랜에 맡겼다.
유럽문명의 굴욕이었다. 이렇게 유럽은 양차대전
으로 미군과 소련군에게 자신들의 국토와 인민을
철저히 짓밟히도록 역사적 어리석음을 저질렀다.
서구의 현대적 지성은 자신들 내부의 악마성을
방치하여 스스로를 파괴했다는 고백과 참회를
하게 되었다. 그것이 엘리제 화약을 통한 독불
화해와 유럽연합(EU)의 탄생이었다. 나토의 방어
울타리 안에서 서유럽 자본주의가 노동세력과 빵
과 술뿐 아니라 여유있는 노후를 함께 나누는 실
험을 하고있다. 근현대 서구문명의 때늦은 반성
이라고 하겠다.

유럽에서 미국이 나토를, 소련이 동구권 국가연합
방어기구 코메콘을 만들어 군사적 균형을 이뤄냈
다면 정치지형이 다른 동아시아에는 전혀 다른 양
상이 벌어졌다. 중국에서 장개석군이 모택동 사회
주의세력에게 패배하자 미국은 패전국 일본을 반
공의 보루로 삼았고 한반도와 베트남 반도는 분단
되어 동족상잔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한반도와
베트남 전쟁은 일본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일본은
최근까지 미국에 이어서 G2국가로 겸제번영을
구가하며 미국을 추격했다. 그러나 비핵국가 일본
이 명실공히 G1국가가 된다는 것은 핵보유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분수를 모르는 망상이었다.

2차세계대전이 끝나자 이른바 냉전시대는 한반도
에 냉전분단시대라는 혹독한 희생을 강요했다. 냉
전의 최전선 쇼원도우 역할을 해야했다. 악착스런
상호적대가 지배했다. 적대적 상호의존권력이 서로
도와주면서 유지되는 역설이 나타나기도 했다.
유럽에서는 전범국 독일이 분단되었지만 아시아에
서는 일본 대신 식민지 피해국 한반도와 베트남이
분단과 전쟁의 희생을 고스란히 대신 겪어야했다.

핵전쟁의 공포 속에서 숱한 국지전을 일으켜온
미국과 소련의 지루한 대결도 역시 미국의 압도적
생산력에 소련의 비효율적 체제로는 대응할 수 없
었다. 소비에트의 해체는 동구권의 붕괴와 독일통
일을 가져왔다. 소련방을 중심으로 형성된 동구권
국가들의 분업형 체제는 소련방 자체의 관료화에
불균동한 자원배분까지 겹쳐 스스로 무너지도록
만들었다. 카톨릭이 지배적인 폴란드 항가리 체코
슬로바키아 루마니아에 자유노조운동이 번진 것은
무너지려는 집에 가벼운 태풍이 지나갔지만 그것은
마치 역사적 대변혁으로 비쳐졌다.중화인민공화국
도 중-소 이념분쟁을 거치고 소련의 수정주의를 비
판하면서 미국과 화해하고 개혁개방노선 즉 자본주
의 경쟁체제를 받아들여 혼합경제를 발전시켔다.

미국이 소련방 해체로 최대의 핵강국과 세계기축
통화국이라는 위치를 확보하자 미국의 기업들은
이전의 사회주의귄을 비롯, 세계의 국경과 민족의
경계를 가리지않고 무차별 진출을 서슴치 않았다.
미국은 다른 나라들이 저항하여 주저앉은 것이 아
니라 미제국의 기업들의 탐욕, 국내의 땅투기와
금융자본의 주식투기 등으로 신뢰를 잃어갔고
기업팽창과 국가기구의 비대화는 군비확창을
가져왔다. 2008년의 세계금융위기는 어떤 다른
나라와의 전쟁이 아닌 내부의 체제모순으로 최
대 핵강대국-세계기축통화국이 스스로 무너져
간 것으로 기록할 것이다. 그에 따른 재정파탄은 국력의저하로 나타났다. 반면에 개혁개방정책을
과감히 도입한 중국은 급속한 겅제발전을 실현,
2013~14년에는 일본을 G2자리에서 밀어내고
미중 패귄시대를 연출했다.

해체 이전의 소련방의 역사도 하나하나 햇볕 밖
으로 나왔다. 레닌 퇴장 후 스탈린의 비밀경찰테러
정치, 후르쇼프의 구체제 극복노력과 쿠바위기를
통한 대미화해 접근 등, 후르쇼프의 대미유화노선
에 대한 중국의 수정주의 비판, 그에 따른 중소이념
분쟁과 우수리강 진보도(다만스키)에서의 중소 무
력충돌이 잇따랐다. 1차세대전과 혁명 뒤의 체제
정비과정에 빚어진 숙청과 내전.이민 그리고 소
련방내의 소수민족 강제이전 뿌리뽑기 등이 드러
났다. 힌반도 출신 고려인들의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가 대표적이었다. 러시아혁명 이후 강화된
관료체제, 제정러시아 정보기관 오크라나요원
을 그대로 충원했던 신체제의 체카 KGB행태는
지난날과 달라지지 않았다.
러시아혁명 이후 세계 공산주의운동과 민족
해방운동의 실질적 중추로 등장한 국제공산당
(커뮤니스트 인터내쇼날)은 각국 각민족의 대
표, 운동가들에게 소련방을 지키고 그 둘레에
단결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소련
방 '일국사회주의'를 지켜내자는 정책이 특히
2차대전 중에 극에 달했다. 그 방침에 따르지
않는 각국과 각민족의 대표들은 단호히 배제
되거나 숙청당했다. 소련의 이런 독단적 세계
진보운동에 대한 시각이 냉전시기의 50년대
에 반둥정신으로 나타났다. 유고의 티토, 이탈
리아의 그람시의 반발로 나타났으며 앙드레
지드 등 프랑스 지식인들의 대거 이탈은 서구
지식인들의 소련혁명에 대한 환멸로 귀결했다.

2차 대전 이후 미국 소련 G2핵강국의 공포를
통한 평화공존 시대는 긴 터널을 지나갔다. 이
기간에 미국은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그리스내
전 중동국지전 중남미 내전개입을 통해서 소련
의 대외전략, 그에 따른 중국과 소련의 시각의
차이가 노선의 충돌로 발전하는 것을 주목하면
서 미국의 중국 접근으로 나타났다. 우수리강
진보도에서의 중소 무력충돌 이후 중국은 소련
이 후환을 없애기 위해 모택동제거를 위한 무력
쿠데타를 시도하거나 침공할지 모른다는 두려
움에 사로잡혀있었다. 그 우려는국방상 임표의
몰락으로 일단락되었고 중소위기는 베트남전쟁
종결과 함께 미국-소련-중국 3국 정립구도로 정
리되었다. 같은 사회주의 동맹국이었던 중국 소
련이 미국의 선택을 기다리는 형세로 변했다. 세
나라들이 모두 핵보유국들이기 때문에 가능한 구
도였다.

핵전쟁과 재래전이 아닌 수단으로 상대를 패배시
키는 방법은 상대를 스스로 쓰러지도록 만드는
지구전적 경제전이 될 수밖에없다. 미국은 자해가
되는 길을 택하면서 소런을 압박했다. 핵무기 핵
탄두 보유 확대, 투발수단의 우주화 즉 별들의 전
쟁을 선언했다. 과도한 관료화, 생산침체와 과학
기술의 낙후는 소련경제를 피폐화로 이끌었다.
3국 정립체제를 전망하던 중국은 1979년 미국
과 수교했다.


신냉전 속에서 한국의 선택모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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