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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교철학은 욕망을 그대로 두고 자연스럽게 없애려 한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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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교철학은 욕망을 그대로 두고 자연스럽게 없애려 한다.

동진대성 2016. 6. 27.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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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교철학도 유교철학이나 불교철학처럼 욕망을 경계하고 위험시한다. 다만 유교철학과 불교철학이 욕망과 맞서 싸우려는 경향이 짙은 반면, 도교철학은 욕망을 그대로 두고 자연스럽게 없애려 한다. 욕망을 없애기 위해 마음을 쥐어짜지 않아 시원스럽고 한결 부드럽게 느껴진다. 더군다나 도교철학에는 욕망을 억누르지 않고 좇으려는 사상의 흐름도 있고, 불로장생과 방중술의 추구도 있다. 이런 점에서 도교철학을 금욕주의로 간주하기에는 약간 애매한 면이 있다.

양주()1)나 열자()2), 노자, 그리고 장자는 춘추전국 시대의 도교철학자들이지만 시대적으로 정확하게 그 연대를 확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여기서는 도교철학의 사상적 흐름에 따라 양주, 열자, 노자, 장자의 순서로 그들이 욕망을 어떻게 보았는지를 살펴보자.

도교의 수행 성지이자 명산인 무당산()의 자하궁() <출처: (cc) Gisling at Wikimedia.org>

양주의 생명 중시 사상

양주의 사상은 한마디로 경물중생()이다. 경물중생이란 혼란한 세상에 재물을 쌓고 명리를 추구하기보다 자신의 생명을 중시하여 아끼고 보살피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양주는 의로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우려 하지 않았고 위태로운 성에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내 정강이의 털 한 오라기를 뽑아서 천하를 이롭게 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뽑지 않겠노라"는 양주의 선언은 경물중생의 사상을 극단적으로 잘 드러내고 있다.

양주의 사상을 이어받은 선비들은 혼란한 세상에서 생명을 아끼고 보살피기 위해 초야에 숨어 살았다. 그리고 그들은 생명력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 욕망을 통제하는 양생()의 길을 걸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양생의 길, 즉 절욕()은 생명력을 도리어 위축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욕망의 통제란 그들에게조차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었다.

마음 내키는 대로 살아라!

열자는 도가학파의 대표적 인물 중 한 사람으로 후세의 철학과 문학, 종교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그들은 절욕으로부터 종욕(), 즉 욕망의 방임으로 방향을 돌렸다. 대체로 욕망은 충족하지 않으면 못 배길 정도로 힘이 세다. 만일 우리가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이런 양생의 길은 도리어 욕망을 억눌러서 생명력을 위축시킬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욕망을 이겨서 다스리지 못한다면 제압하지 못한 욕망으로 인해 마음에 상처를 입을 수 있다.

우리는 욕망을 충족하지 못해도 상처를 받고, 제압하지 못해도 상처를 받는다. 거듭해서 마음의 상처를 받는 셈이다. 이를 일컬어 중상(: 거듭 해침, 거듭 상처받기)이라 한다. 이처럼 절욕이라는 양생의 길은 두 번씩이나 사람을 해칠 수 있으므로 그들은 이런 금욕주의를 반대하고 욕망의 방임을 주장했다.

<열자> 「양주편」과 <장자> 「양왕편」에는 종욕이 양생의 길로 제시되어 있다. <열자> 「양주편」에는 관이오()3)의 양생법이 종욕으로 소개되어 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할 뿐이오. … 귀는 듣고 싶은 대로 듣고, 눈은 보고 싶은 대로 보고, 코는 냄새 맡고 싶은 대로 맡고, 입은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하고, 몸은 편안히 지내고 싶은 대로 지내고, 마음은 뜻대로 실행하면 그만이오. … 이와 같이 사람이 자신의 모든 자연적 본능을 막아 버린다는 것은 아주 잔혹한 군주의 행위, 곧 이성과 지혜의 작용이 아닐 수 없소. 이런 이성과 지혜의 작용을 제거한 연후에 매일매일 뜻대로 기쁘게 살다가 죽는 날에 가서 죽을 뿐이오.”

요컨대 <열자> 「양주편」은 욕망을 억누르지 말고 자연스럽게 발산하면서 즐겁게 인생을 살아가라고 권고하는 셈이다. 욕망에 충실하고 인생을 즐기려는 현대인들은 이런 권고를 환영할 수도 있겠지만 욕망의 자연스러운 발산은 현실적으로 여러 장애를 만나 실현 불가능하다. 그뿐만 아니라 욕망의 자연스러운 발산으로 양생하려는 사상은 욕망의 인위성을 간파하지 못해 아무래도 속물적인 경향을 드러낸다.

노자의 무위자연() 사상

전설에 따르면 노자는 물소를 타고 주나라를 떠났다.

경물중생의 선비들과 달리 노자는 욕망의 대부분이 인위적임을 간파하였다. 그는 <도덕경> 3장에서 욕망이 인위적으로 생기는 까닭을 제시하였다. 위정자가 현자를 숭상함으로써 백성의 경쟁심을 자극하고,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중히 여김으로써 백성의 소유욕을 부채질하며, 야욕을 보임으로써 백성의 권력욕을 부추긴다. 이리하여 그는 백성의 욕망이 위정자의 그릇된 정치에 의해 인위적으로 형성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시각, 청각, 미각과 같은 감각작용은 어디까지나 사람의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오색(푸르고 누렇고 붉고 희고 검은 색깔)과 오음(궁·상·각·치·우)과 오미(시고 짜고 맵고 달고 쓴 맛)의 감각작용에 집착하고 승마와 사냥에 탐닉함으로써 순박한 마음을 뒤흔들어 쾌락을 추구하는 욕망에 빠져든다. 노자는 <도덕경> 12장에서 이렇게 경고했다.

이렇게 본다면 욕망의 대부분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생긴 것이므로 우리의 생존에 필수적인 자연의 필요를 넘어서 있다. 휘황찬란한 빛깔도, 현란한 음악이나 산해진미()도 우리의 생존에 필수불가결한 것은 아니다. 음식은 배를 채우고 건강을 유지하는 정도로 족하다. 산천초목이 빚어내는 빛깔과 소리만으로도 흐뭇하다. 말을 타고 사냥을 하더라도 먹을거리 정도만 장만하면 된다. 모름지기 우리는 생존에 꼭 필요한 일만 하는 순박한 삶을 살아야 한다. 이런 삶이야말로 노자가 궁극적으로 내세우는 무위자연의 삶으로 이어질 수 있다.

무위자연의 삶

그럼 무위자연의 삶이란 무엇일까? 인위적으로 무엇을 하지 않고 자연과 어우러져 순박하게 사는 삶이다. 무위자연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노자는 대강 네 가지를 주문하였다.

첫째로, 사사로움을 줄이고 욕심을 덜며(소사과욕; ) 마음을 고요하게 비워서 자연의 도를 체득하라. 인위적인 욕망이 우리를 들볶고 닦달하여 심신이 쉴 틈을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순박함을 깨뜨려서 마음을 어지럽힐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물 흐르듯이 살아가라. 물이란 뭔가에 부딪히면 돌아서 흐르고 둥근 그릇에는 둥글게, 네모난 그릇에는 네모나게 담긴다. 이와 같이 물이란 부드럽고 약해서 억지로 흐르지 않고 어디에도 순응한다. 그렇지만 물은 무엇이든 쓸어버릴 수 있을 만큼 강력하다. 노자는 부드럽고 약한 것이 굳세고 강한 것을 이긴다고 하지 않았던가. 또한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고 뭇사람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 이런 점에서 물은 자애롭기도 하다.

셋째로, 갓난아이가 되어라. 사람은 살아 있을 때는 말랑말랑하지만 죽으면 뻣뻣하고 딱딱해진다. 이를 일반화하면, 굳세고 강한 것은 죽음의 무리고 부드럽고 약한 것은 삶의 무리라 할 수 있다. 살아 있는 사람 가운데 가장 부드럽고 약한 자는 갓난아이다. 그래서 갓난아이가 생명력이 가장 강하다.

부드러운 태극권은 양생 효과를 인정받고 있다. <출처: (cc) Yürgen Oster at Wikimedia.org>

현대적인 예를 들어본다면, 운동선수들은 경기에 나가기 전에 몸에 힘을 빼라는 충고를 종종 받는다. 경기에 이길 욕심이 앞서면 긴장되어 몸에 힘이 들어가고 뻣뻣해진다는 뜻일 것이다. 욕심을 버리면 몸이 부드러워져서 제 기량을 발휘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넷째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아무리 권세와 재물이 많다 하더라도 이것들에 만족하지 않으면 여전히 가난한 법이다. 이렇게 부족감을 느끼는 자가 넉넉할 수는 없을 것이다. 노자는 만족할 줄 아는 자가 부자라고 하였다. 여기서 부자란 마음이 충만해서 부족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다. 우리는 만족할 줄 몰라 소유욕에 사로잡힘으로써 화를 초래하고 허물을 남긴다. 따라서 무위자연의 삶에는 욕망을 덜어내고 없애는 일이 필수불가결하다.

인위적인 욕망을 경계한 장자

장자도 노자와 마찬가지로 무위자연의 삶을 살 것을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무위자연의 삶이란 인위적인 욕망을 버리고 자연으로부터 주어진 자기 본래의 성품에 따라 생긴 대로 살아가는 삶이다. 그는 노자처럼 오색(), 오성(), 오취(), 오미() 등에 집착하고 이해득실에 따라 잔머리를 굴리는 욕심이 생명을 해치는 화근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욕심이 깊은 자는 본성의 기틀이 얕다고 하여 욕망을 경계했다.

장자는 자연적인 것과 인위적인 것을 확실히 구분하였다. 그에 따르면 자연적인 것은 안에 있고 인위적인 것은 밖에 있다. 예컨대, 소와 말이 네 다리로 야생에서 뛰어다니는 것은 자연적인 것이지만 말에게 멍에를 씌우고 소에 고삐를 매어서 길들이는 것은 인위적인 것이다.

나비의 꿈을 꾸는 장자

그런데 야생에서 자유롭게 뛰노는 말과 소가 행복할까, 아니면 사람이 주는 먹이를 풍족하게 받아먹으면서 길들여지는 말과 소가 행복할까? 당연히 전자가 행복할 것이다. 이들은 생긴 대로 본성에 따라 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오리는 다리가 짧은 대로, 학은 다리가 긴 대로 살면 행복하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사람도 인위적인 욕망에 사로잡혀서는 행복할 수 없다. 인위적인 욕망을 버리고 생긴 대로 순박하게 살아간다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법이다.

그리고 그는 인위적인 욕망은 자연의 필요를 넘어선 것에 불과하다고 강조하였다. 뱁새가 둥지를 틀어도 나뭇가지 한 개로 족하고 생쥐가 황하의 물을 마시더라도 한 줌에 불과하듯이 사람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게 얼마나 되겠는가? 높은 사회적 지위, 대궐 같은 집, 산해진미 등을 좇는 욕망은 인위적인 것으로, 자연의 필요를 넘어선 욕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인위적인 욕망과 사사로움을 버리고 사물의 자연스러운 흐름에 따라 살라고 권장하였다.

심재()와 좌망()

무위자연의 사상은 노자와 장자가 공통적으로 지향하는 것이다. 그런데 장자는 노자에 비해서 세속적 삶에 대한 비애와 절망감이 훨씬 컸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해결책을 찾기보다는 마음의 절대적 경지를 추구하였다.

그는 <남화경>의 「소요유편」에서 북해의 곤이라는 물고기가 큰 붕새가 되어 남녘 하늘로 훨훨 날아오르듯이 아무런 세속적 구속 없이 자유롭게 노니는 삶의 경지인 소요유()를 꿈꾸었다. 그리고 「제물론편」에서는 선악, 시비, 득실, 미추, 귀천, 생사 등의 상대적 차별과 대립을 넘어선 만물제동(; 만물은 모두 똑같다)의 경지를 꿈꾸었다. 그는 이에 이르는 수행의 방법으로 심재와 좌망을 들었다.

도교의 사제 격인 도사()

심재란 몸의 감각작용과 지각작용을 끊어 마음을 가다듬고 비우는 수행을 일컫는다. 좌망은 몸의 감각작용과 지각작용을 물리쳐 호오의 분별을 끊고 욕망도 나도 잊어 천지와 크게 통해 천인합일()을 이루는 수행을 가리킨다. 심재와 좌망은 다 같이 인위적인 욕망을 덜어내어 자연으로 돌아가는 삶이자 상대적 차별을 넘어선 절대적 경지에 이르는 수행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자연으로 돌아가서 순박한 본성에 따라 살아가라는 노자와 장자의 가르침은 유교의 금욕주의와는 확실히 구분된다. 유교철학에서는 사람의 마음이 욕망의 준동을 항상 감시하고 통제해야 하므로 마치 사람의 마음을 쥐어짜는 것과 같다. 이에 반해 무위자연 사상은 마음을 비움으로써 자연스럽게 인위적 욕망을 덜어낸다.

오늘날 우리에게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노자와 장자의 주문은 비현실적인 것처럼 보인다. 더군다나 소요유와 만물제동의 경지는 하늘로 너무 높이 올라갔고 심재와 좌망 같은 수행 방법도 실천이 쉽지 않다. 그러나 도교철학은 우리의 마음을 활짝 열어주고 욕망과 맞짱 뜨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덜어내는 방법을 안내해 준다.

동양의 금욕주의의 의의

서양의 이성 중심적 금욕주의처럼 동양의 금욕주의도 욕망을 위험시하고 경계하여 없애려고 하였다. 하지만 동양의 금욕주의는 이성을 통해 욕망을 억누르거나 없애려고 하지는 않았다.

유교철학에서는 예를 강조하긴 했지만 안분지족의 삶을 지향했고 호연지기를 기르는 등의 인격수양을 통해 욕망을 극복하려고 하였다. 불교철학에서는 욕망을 죄악시하였지만 호흡과 명상을 통하여 거친 욕망을 가라앉히려고 하였다. 도교철학에서는 순박한 본성으로 돌아가 욕망을 잊어버리려고 하였다. 이런 점에서 동양의 금욕주의는 서양의 이성 중심적 금욕주의와는 다르다.

서양문물의 절대적 영향 아래 살고 있는 우리는 동양철학의 힘과 가치를 경시하거나 무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서양철학에는 결여되어 있는 영적인 차원의 인격수양, 호흡과 명상, 그리고 욕망을 억누르지 않고 자연스럽게 잊어버리는 수행 방법 등은 오늘날 적극적으로 되살리는 게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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