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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누리당 김무성부친 친일논란 ‘부친 친일 의혹’ 왜곡과 날조에 얼룩진 ‘애국행보’ 김용주 평전 『강을 건너는 산』 본문

2025년 말하다

새누리당 김무성부친 친일논란 ‘부친 친일 의혹’ 왜곡과 날조에 얼룩진 ‘애국행보’ 김용주 평전 『강을 건너는 산』

동진대성 2016. 8. 26.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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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부축한 숨은 일꾼을 뒤늦게나마 밝히는 데 의의를 지닌「광복 70주년 기획, 새로운 역사인물찾기」 제1권 김용주 평전 『강을 건너는 산』. 이 책은 일제 강점기에 삼일상회를 시작으로 일제에 맞서고, 6ㆍ25 전쟁 속에서 경복궁 폭격을 저지하는 등 우리의 얼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김용주의 삶을 실증 자료를 통해 구체적으로 다루었다

 

새누리당 김무성부친 친일논란 ‘부친 친일 의혹’ 왜곡과 날조에 얼룩진 ‘애국행보’ 김용주 평전 『강을 건너는 산』

 

 

 

제1장 스캡(SCAP) 전선 이상 없다
― 김용주의 6ㆍ25

F51 전투기 10대만 빌려달라고 해 | 한국은행권 지폐를 일본에서 찍은 사연 | 주일특명전권공사 | 맥아더 사령관 첫 대면 | 6ㆍ25 발발과 조총련의 발광 | 재일거류민단 육성문제 | ‘자유의 종’ 방송과 대한(對韓)신문 | 장개석 총통, 2개 사단 파병 제의 | 페니실린 없으면 부상병 다 죽는다 | 인천상륙작전과 재일교포 의용군 | 서울수복작전과 문화재 수호 | 일본에는 고철도 안 판다 | 이 대통령 반일 감정의 극치 ‘왜관발언’ | Dodge’s Line 정책 | 특명전권공사 사임 | 맥아더 원수와의 특별한 이별

제2장 극일(克日)로 이겨낸 망국의 한(恨)
― 김용주의 일제강점기

식산은행원 시절과 청년운동 | 포항 삼일상회 | 포항운수주식회사 | 동해 정어리 어업 | 사립 영흥국민학교 설립 | 민족교육 위한 창씨와 한국역사연구회 | 정치 저항 위한 도의회의원 출마 | 총독부의 교활한 사립학교 통치 | 천조신궁에 단군묘도 함께 모시자 | 사장 취임도 거부하는 일본경찰 | 조선인 학살계획과 총살 대상 제1호

제3장 새로운 통치자 미 군정과의 줄다리기
― 김용주의 해방정국

해방조국을 위한 새 진로 설정 | 부산호와 광제호 태극기 | 대한상공회의소와 한국무역협회 창립 | 신생 한국경제의 물꼬를 트다 ― 새로운 투자 ― 미 국무성과 담판 | 태평양전쟁 징발선박 반환 교섭 | 최초 남북교역선 앵도호(櫻島號) ― 한 동포라는 믿음 ― 헌신짝이 된 동포애 | 대한해운공사 창립 | 홍콩 정기항로 개설 | 한국 군함 제1호 백두산호

제4장 독재와 무질서가 부른 4ㆍ19와 5ㆍ16
― 김용주의 정치 경제

대통령 측근의 외압과 모략 | 대한해운공사 사장 사임 | 신한학술연구회 창립 | 참의원 당선과 민주당 원내총무 | 대한중석 1백만 달러 커미션 사건 | 대일청구 5억 달러 논의 | 5ㆍ16 전야의 민주당 최고회의 | 혁명 총성과 미 대사관 방문 | 김용주가 본 내각책임제와 정당정치 | 주한 유엔군 총사령관 데커 장군과의 해후 | 일본 정계요인들과의 모임 | 용문중ㆍ고등학교 설립 | 김용주와 호남과의 인연 ― 전남중ㆍ고등학교 설립과 무상 헌납 ― 전남 화순군, 장흥군에 1천만 주 조림 ― 무등경기장 부지 무상 기부 | 대한방직협회 회장 ― 방직업 불황은 정부 정책 탓 ― 수출보상책 시행 ― 미 국무성 설득으로 원사 가격 지불 조정 ― 공판제도로 국내 판매 질서 확립 | 한국경영자총연합회 회장 ― 노사 문제는 가장 어려운 문제 ― 대화와 설득은 최선의 노사정책

제5장 냉철한 머리 따뜻한 가슴
― 김용주의 주변 이야기

김용주가 본 세계 속의 한국 | 1천만 주 조림사업 | 김용주의 작은 행복 두 가지 | 김용주가 말하는 이 사람들 ― 이승만 대통령 ― 맥아더 사령관 ― 영친왕 이은(李垠) ― 윤치호 선생 ― 일본인 후쿠지(福士) 선생 ― 민속학자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 친일파 박춘금

 

 

 

 
 

海村(해촌) 김용주(金龍周)
강을 건너는 산
일제하 剋日(극일)에서 광복후 정·재계 활약

 

창업 1세대 기업인으로 각인되어 온 해촌(海村) 김용주(金龍周, 1905~1985) 전 대한방직협회장이 외교관과 정치인으로 큰 발자취를 남긴 기록이 ‘강을 건너는 산’이란 제목으로 발간됐다. 도서출판 청어가 광복 70주년 기획으로 ‘새로운 역사인물 찾기’ 첫 번째로 김용주 전 회장의 평전을 기획 출판한 것이다.

 

민족수난기 용감하게 강 건너는 큰산

 

왜 ‘강을 건너는 산’이라고 했을까. 편저자 이성춘, 김현진 씨는 해촌이 일제 강점기 극일(剋日)로부터 8.15와 6.25를 겪은 민족수난의 강을 앞에 두고 우두커니 지켜본 산이 아니라 ‘용감하게 강을 건너는 산’이었다고 종합 해설한 제목이다.
해촌은 해방된 조국에서 미 군정청과 격론하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외고집에 맞서고 6.25 때는 맥아더 장군을 설득하면서 강을 건너는 큰산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 6.25 전쟁 발발 직후, 부산에 머물던 이승만 대통령과 통화하는 김용주 공사.

아호 해촌(海村)에는 우리나라 해운사의 효시인 대한해운공사 설립의 뜻이 담겨있다. 해촌은 해방 직후 미 군정청이 조선에 있는 모든 일본기업을 적산(敵産)으로 분류하자 미 국무성 당국자와 논쟁과 설득을 거듭하여 조선인 소유의 주식재산을 인정받아 신생 대한민국의 민족자본 형성의 길을 열었다. 이 결과 대한해운공사가 설립되어 해촌이 초대 사장을 맡을 수 있었으니 그는 곧 한국 해운산업의 창업자라 할 수 있다.

   
▲ (좌측) 김용주 공사 취임 민단 환영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 (우측)주일대표부에서 6.25전쟁 중 긴급지원을 하기 위한 회의장면.

전쟁기간 주일공사로 큰 활약

1950년 6월 25일, 김일성의 불법 남침전쟁이 일어난 날 해촌은 주일 특명 전권대사로서 오사카의 교포사회를 시찰하며 재일 거류민단 육성문제에 골몰하고 있었다. 전쟁 발발 3일째, 6월 28일 밤,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맥아더 사령부를 찾아가 급히 P51 전투기 10대를 빌려오라”는 전화 지시를 받았다.
서둘러 점령군 최고 사령부로 달려갔더니 부관이 밤늦게나 장군이 돌아올 것 같다고 귀띔했다. 밤 9시경에 연락을 받고 뛰어갔더니 맥아더 장군이 여유 있는 모습으로 맞았다. 이미 미 공군이 한국전선에 출격했다는 사실과 아침에 서울로 날아가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고 돌아왔다고 일러 주었다.

   
▲ 1920년 부산상고 재학 시절.

이로부터 서울과 도쿄 간에는 통신이 두절되어 서울중앙방송(KBS)을 들어보니 이미 적기가(赤旗歌)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김 공사가 다시 맥아더 사령부를 방문하여 NHK 방송국 한 구석을 빌려 대한방송(對韓放送)을 하게 허용해 줄 것을 요청하자 쾌히 승낙했다.
1950년 6월 29일 저녁 9시, 김 공사가 “여기는 도쿄입니다”라는 오프닝 멘트를 시작으로 ‘자유의 종’ 방송을 개시하여 침략군을 격퇴하기 위한 유엔군의 활약상 등을 전해 주었다. 곧이어 한글판 주간 대한신문(對韓新聞)을 발간하여 재일동포들에게 고국의 전쟁소식을 전해주었다. 방송과 신문을 통해 피 끓는 재일 학도의용군이 모집되고 구호 금품도 몰려들었다.
이 무렵 모국으로부터 현찰이 고갈되어 전쟁비용 조달이 급박하다는 소식이 전해왔다. 한국은행을 인민군이 접수하여 유엔군과 한국군의 전비를 확보할 길이 없어졌다니 국가의 존망이 걸린 문제였다.
이에 김 공사가 일본 당국의 협조를 요청하고 한은 도쿄지점을 독려하여 급히 1,000권 지폐를 인쇄할 수 있었다.
전황이 급박할 때 가장 먼저 대만의 장개석 총통이 2개사단 전투병 파병을 제안해 왔다. 그러나 이승만 박사는 갓 건국된 중공군의 참전을 우려하여 이를 사양하고 말았다. 반면에 주일 공사에서는 거류민단과 협조하여 재일 학도의용군을 모집, 참전시켰다.
전쟁은 낙동강 방어전에 운명을 걸고 있었다. 이때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서울이 수복됐다. 이때 김 공사는 맥아더 사령부를 찾아 서울수복 작전 시 덕수궁을 비롯한 600년 고도(古都)인 서울의 문화재 보호를 간청하여 이를 관철시킬 수 있었다.

장수 방협, 경총회장의 발자취

해촌은 1905년 경남 함양에서 출생하여 부산상고를 나와 식산은행(산은)에 근무하다 사업전선으로 나섰다. 포항에서 3.1운동 정신을 담은 삼일상회(三一商會)를 설립, 돈을 벌어가며 야학으로 시작하여 초등학교 설립으로 조선인 교육에 이바지하기 시작했다. 이를 기반으로 경북도의회 민선 도의원에 당선되어 조선총독부의 민족차별 문제에 도전하고 천조신궁에 단군묘도 함께 모시자고 주장하여 일본 헌병에게 잡혀가기도 했다. 이 때문에 일제 말기에는 포항지역 총살 대상 제1호로 지목됐었다.

   
▲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 시절. 인사말을 하고 있다.

해촌은 8.15 후 대한해운공사 창립사장을 거쳐 전남방직 사장, 신한제분 회장으로 경제 활동하다가 민주당 참의원과 원내총무로 정계에서도 크게 활약했다. 그러나 해촌이 남긴 발자국은 방협(紡協) 회장과 경총(經總) 회장으로 대화와 설득 및 타협의 리더십을 한껏 발휘했다는 평가이다.
5.16 후 면방업체로 돌아온 해촌은 1967년 방협회장을 맡아 당시 주력산업이던 면방업의 불황타개에 앞장서고 이를 계기로 초대 경총회장에 추대되어 노사 대화의 틀을 만들어 냈다. 당시 노사문제는 곧 면방업계 문제라고 지적할 만큼 부상되어 이를 조정한 해촌의 후임자가 없어 장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 뒤 코오롱 이동찬 회장이 경총회장에 추대되어 역시 후임자가 없어 여러 차례 중임한 후 해촌의 장남 김창성(金昌星) 회장이 억지춘향으로 대물림 받기도 했다.
편저자 이성춘, 김현진 씨는 ‘강을 건너는 산’ 집필과정에 고인이 남긴 회고록 ‘풍설시대 80년’을 크게 참고했다고 밝혔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93호 (2015년 9월호) 기사입니다]

경제풍월 기자  teuss@econotalking.kr

 

 

 

“1933년 포항읍 인구는 3만명이 넘어 도청소재지 대구에 버금가는 경북 제2의 도시였다. 인구와 읍 규모에 비해 읍내 거주 한국학동을 위한 교육기관은 미미했다. 공립보통학교 1교와 기독교회에서 운영하는 사립보통학교 1교 등 고작 2교에 불과했다” 

고 해촌(海村) 김용주<사진> 선생은 지난 15일 발간된 자신의 평전 `강을 건너는 산`-(도서출판 청어, 이성춘·김현진 편저)에서 일제 치하였던 당시 사립 영흥국민학교를 설립하게 된 배경을 담담히 전하고 있다.

“첫 아이(장녀 김문희)도 무려 8대1의 경쟁을 뚫고 입학을 했다. 하지만 기쁘지 않았다. 학교부족으로 제대로 취학을 못한 다른 어린이들을 보고 교육당국의 거짓정책에 분격했다”며 학교설립의 구체적인 동기를 밝히고 있다. 

그러던 중 기독교회에서 운영하던 영흥보통학교가 폐교됐다. 교육당국이 신사참배, 일장기 게양 등을 강요하자 교회 측은 교계명에 위배되는 일이라며 버틴 것이다. 그러나 갖은 탄압이 계속되자 교회측은 자진해 학교를 폐교했다. 1933년 3월의 일이다. 

해촌은 우선 가교사 하나를 마련했다. 설립허가까지는 막대한 적립금과 더불어 1년이상의 시일이 소요되기에 교회당 건물 안에서 운영하면 영흥국민학교의 교명과 허가를 인계받는 형식을 취하기로 교회측과 합의를 봤다. 구 영흥국민학교는 학교자체의 독립된 교사도 없이 단지 교회당을 이용해 평일엔 학교로 쓰고 주일이나 예배 시에는 예배당으로 써 왔다. 결국 해촌이 교회측으로부터 인계받은 것은 교명과 학동 뿐이었다. “새로이 교사 등을 신축하고 보니 사실상 새로 설립한 학교였다. 당시 내가 여기에 투입한 금액은 재산의 절반을 넘었다”고 해촌은 전한다. 

`동해의 정어리 어업`이란 제목에서는 정어리 어업계가 가속도로 호황을 거듭하자 어군탐지의 신속 정확을 위해 비행기까지 동원된 점을 소개하고 있다.  

각 정어리 어선에 무전설비를 갖게 해 공중으로부터 어군을 탐지· 발견하면 무전으로 각 어선에 통보하는 과학적 방법을 이용했다. “공중에서 무전이 오면 어선과 운반선 수백척이 일제히 앞을 다투어 그 수역으로 달려 갔다. 그 광경은 마치 해전을 방불케했다”고 당시 상황을 묘사했다.

이밖에도 해촌은 포항 삼일상회와 포항운수주식회사 설립 과정과 도의원 출마 배경 및 도의회에서의 활동상황 등을 자세히 전하고 있다. 

1926년 10월, 해촌은 포항에 있던 조선식산은행원직을 사임하고 `三日商會`라는 간판을 내 걸고 사업의 길로 들어선다. 첫 사업체 이름을 삼일상회라고 한데는 그 혼자만의 숨은 뜻이 있었다.

“삼일 민족운동의 정신을 본받는 뜻에서 붙인 것인데, 일찍이 민족의식에 눈을 떠 청년운동에 열중했던 나의 심혼을 표시한 그 상호는 다분히 의식적이고 민족적인 인상을 풍기었다.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상의하지 않고 스스로의 뜻에 따라 이 상호를 정한 것이었다.”(회고록 `풍설시대 80년` 중에서)

해촌이 첫 회사 이름을 삼일상회라고 지은 것은 목숨의 위험도 감수하겠다는 각오가 되어있지 않고서는 불가능러을 것이다. 왜냐면 그때까지만 해도 조선총독부는 기미년 삼일독립운동의 트라우마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해 `삼일정신`이란 말만 들어도 경찰과 헌병을 동원해 온갖 핍박을 다했기 때문이라고 책은 전한다.

해촌(1905~1985)은 경남 함양에서 태어났지만 청장년시절 대부분을 포항에서 보냈다. 1923년 부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포항의 식산은행에 취직한 뒤 포항청년회 지육부장을 맡아 야학을 개설하는 등 조선인 계몽운동에 나섰다. 경북도의회 민선도의원 시절에는 조선총독부의 조선인 차별정책을 비판하는 등 태평양 전쟁 말기에는 일제로부터 포항지역 총살대상 제1호로 지목되기도 했다. 그의 회고록 `풍설시대 80년`에서 포항에 관한 이야기가 많은 이유다. 특히 주일특명전권공사로 부임해 6·25전쟁 초기 서울수복작전에서 맥아더 사령부를 설득해 서울시내 문화재를 폭격으로부터 보호한 일화도 이 책은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 해촌 김용주 선생은 1933년 당시 재산의 절반을 투입해 포항 영흥국민학교를 설립, 교장에 취임한다. 사진은 현재 영흥초등학교 교정에 세워진 선생의 송덕비.  
 

포항의 원로인사들은 당시 포항에서 그의 비중과 역할을 자주 술회하고 있지만 요즘 세대에겐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해촌은 1991년 재경포항향우회를 설립하고 초대 회장을 역임한 김창성(84) 고문과 새누리당 김무성(63) 대표의 선친이다.  
 
이석수 전 경북도정무부지사는 “해촌 선생은 20대 초반부터 지역경제를 비롯해 지역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가 손대는 것은 포항서는 모두가 최초이다시피 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새로운 지평선이 하나 둘 열렸다. 지금까지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혜촌 선생을 존경하는 기업인으로, 또 교육자로, 정치인으로 높게 생각하는 것은, 선각자라는 이런 배경이 뒤에 있다. 앞으로도 포항 현대사에서는 해촌 선생을 빼놓고 이야기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창형기자 chlee@kbmaeil.com 

 

http://www.kbmaeil.com/news/articleView.html?idxno=360508

 

 

김무성 대표, ‘부친 친일 의혹’ 왜곡과 날조에 얼룩진 ‘애국행보’ (출처 : 새누리당 .. | http://blog.naver.com/moosung4u/220485037323 블로그) http://naver.me/x8RT1sI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