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위대한 이야기

홍범도 <펜앤드 마이크>에서 홍범도에 관한 자료를 올렸습니다. 본문

2022년 말하다/진실이야기

홍범도 <펜앤드 마이크>에서 홍범도에 관한 자료를 올렸습니다.

동진대성 2022. 9. 2.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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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
<펜앤드 마이크>에서 홍범도에 관한 자료를 올렸습니다.

저도 그 자료를 공유하면서 몇 마디 덧붙입니다.

1) '자유시 사변'을 아십니까?

좌파 사학자들이
대한민국 국사책에서
1921년에 일어난
'자유시 사변(흑하사변)'을 감추고 세월이 흐르니  
오늘날 문재인과 주사파 정부가 홍범도를 영웅으로 추켜세우는군요.

그러나 홍범도와 소위 '좌파들의 독립운동'을 제대로 평가하려면
반드시 '자유시 사변'을 알아야 합니다.

'자유시(러시아 연해주의 도시 알렉셰프스크, 현재 스보보니드) 사변'이란 무엇인가요?

청산리 봉오동 전투 이후
일본군의 대 반격이 예상되자
독립군 지도자들은 깊은 고민에 빠집니다.

일본군과 정면승부를 벌일 것인가?
아니면 더 깊은 산속 오지로 들어갈 것인가? 그렇지 않아도 보급이 어려워 굶주리는데 더 깊은 오지로 들어가면 어떻게 견뎌내겠는가?

이 때 레닌에게서 엄청난 자금을 받았다고 알려진 좌파 항일운동가 이동휘 측에서
러시아 '자유시(알렉셰프스크)'로 가면 레닌 정부가 독립군을 받아줄 것이라는 선전을 해댑니다.

그 선전에 넘어가
당시 여러 독립군 부대들
모두 합해도  
5,000 여 명이 넘어가지 못했던 병력들 가운데
약 3,500 여 명이
러시아 알렉셰프스크(현 스보보니드, 일명 자유시)로 들어갔고
거기에서
'자유시 사변'을 겪습니다.

김좌진 이범석은 이 대열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자유시 사변'이란
고려공산당 이루쿠츠크파와
고려 공산당 샹하이파가
자유시로 들어온 독립군을
서로 손아귀에 넣고자
권력다툼을 벌여 끝내
러시아 적군(赤军,크라스나야 아르미야, Red Army, 붉은 군대)으로 하여금 독립군을 대량학살, 무장해제 시킨 사건입니다.

1917년 10월 볼셰비키 혁명으로 레닌이 정권을 잡았으나 레닌에 반대하고 이전 차르정권에 충성하는 군대가 들고 일어나 저항했으니 그들을 '백군'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레닌의 편에 선 공산당 군대를 적군이라 부르지요. 러시아는 1922년까지 '적.백내전'에 휩쌓이게 됩니다.

그 때 그 적군(赤军), Red Army, 빨갱이 군대가 독립군을 무참히 학살하고 무장해제 시킨 사건이 '자유시 사변'입니다.

전체 독립군 5,000 명도 아니되던 때에
3,500 여 명이 알렉세프스크(일명 자유시)로 들어갔는데  
'자유시 사변'으로 당일에 수 백명이 학살 당했고 나머지는 무장해제 당했고 일부는 죄수가 되어 벌목장에서 강제 노역에 시달리다 생을 마감했습니다. 훗날 독립운동가 김홍일 장군은 이 사실을 책으로 남겼습니다.

필자가 62년 생, 아직도 기억하는 것은 제가 중학생 시절 국사책에 '자유시 사변'이 분명히 나왔었는데 제가 나이들고 홈스쿨로 제 아이들 가르치려고 국사책을 보니 '자유시 사변'이 나오지 않습니다.  언제부턴가 이 '자유시 사변'이 국사책에서 사라진 것이지요.

21세기 문재인 주사파 정부가 홍범도를 추켜세우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누군가 국사책에서 지워버린 이 '자유시 사변'이 얼마나 중대한 의의를 가지는가? 하는 점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1919년 3.1운동,
1920년 봉오동 청산리 전투,
그리고 이어서 1921년 자유시 사변!

그런데 독립운동사를 아무리 찾아봐도
'자유시 사변' 이후로는 단 한 번도 청산리 전투나 봉오동 전투같은 전투가 일어나지 못합니다.

자유시에서 독립군 주력이 와해되었기 때문이지요.

그 후로 무장독립투쟁으로 국권을 되찾자는 꿈은 물거품이 된 겁니다.
좌파들과 러시아 빨갱이 군대, 크라스나야 아르미야, 적군(赤军)이 대한 독립운동사에 저지른 가장 큰 범죄였습니다.  

2) 좌파들이 항일투쟁은 했으나
대한민국 독립운동은 아니었다!

이동휘, 오하묵(자유대대), 그 밖에 박헌영, 김단야, 김원봉... 이 전설적인 공산주의자들이 이 나라 대한민국을 세우기 위한 독립운동을 했다고요?

천만에요!
Never!

그들이 항일운동을 하기는 했지요. 하지만 이런 대한민국과 같은 자유 민주주의 자본주의 나라를 세우기 원치 않았습니다.  

그들은 다른 나라를 세우기 원했습니다. 사회주의 공산주의 국가,  그리고 무엇보다 소련제국에 속한 나라를 세우기 원했지요.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박헌영과 김단야는 샹하이에서 <콤뮤니스트>라는 잡지를 발행합니다.

이 잡지의 타겟은 조선반도에 있는 노동자!
그 노동자들을 배후에서 선동, 조종 파업을 일으키고 공산주의 혁명을 일으키기 위함이었지요. 이 잡지를 배에 싣고 인천에 도착 조선에 뿌렸습니다.

그런데...
기가 막힌 글들이 <콤뮤니스트>에 실립니다.

1932년 김단야가 쓴 글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세계 노동자들의 조국인 소련을 수호한다."

<콤뮤니스트>  4호에서 박헌영은 이런 글을 씁니다.

"코민테른의 전략적 슬로건인 소련을 방위한다....

소련 사회주의 건설이 크게 성공하는 것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콤뮤니스트>는 코민테른을 지지하는 무기다..."

놀랍지요?

이들의 조국이 어디라고요?

"세계 노동자들의 조국 소련을 수호한다."

그래요... 이들의 조국은 조선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소련이 이들의 사상적 조국입니다.

"코민테른의 전략적 슬로건인 소련을 방위한다."

자기 나라 조선도 방위하지 못해서 나라가  망했지요.  조선 땅에서 태어나 조선 독립을 위해서 3.1 만세를 불렀던 박헌영이가
그 큰 나라 소련을 방위하겠답니다.

뭐 하러 남의 나라를 방위해? 그렇지 않아도 멀쩡한 나라고 강대국인데...
망해버린 자신의 조국이나 되찾아야지... 나라도 되찾지 못한 주제에 뭐하러 강대국 소련을 방위하냐?

우린 이런 질문을 하게 되지요.

"소련 사회주의 건설이 크게 성공하는 것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할 대상은 남의 나라 소련이 아니라 망해버린 나라, 당신의 나라 조선이 아니냐?

박헌영 김단야는 왜 이런 글을 썼을까요?

왜냐하면 공산주의자 박헌영 김단야 입장에서는 소련이 자기네 나라라고 생각되기에 소련을 방위하고 소련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자는 겁니다.

이래서 필자는 좌익 공산주의자들의 소위 독립운동을 대한민국 독립운동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유 대한민국을 세우기 원치 않았고 공산주의 사회주의 나라를 세우려 했기 때문이고 소련의 일부인 나라를 세우려 했던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활동은 대한민국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습니다.

박헌영 김단야... 이들이 이런 성향을 드러내는 데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코민테른(Communist International, 약칭이 코민테른, 전세계에 공산주의 퍼뜨리기 위한 공산주의 선교단체라 할 수 있음, 1919년 레닌이 세웠고 1943년 스탈린이 자신의 권력에 도전할 가능성을 의심하여 해체시킴, 여러 나라에 공산주의 사상을 수출하고  지원했음, 중공 북한 등...)

코민테른 가입조건 제 14 조에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코민테른에 가입하고자 하는 모든 정당은 반혁명 세력과 투쟁하고 있는 소련에 대하여 무조건적인 지원을 제공하여야 한다."

코민테른은 여러 나라의 공산주의자들을 부추겨  소련(소비에트 연방) 제국을 세우기 원했던 것입니다.

그 코민테른 돈을 받은 사람이 이동휘였고(이동휘 계열에서 레닌으로부터 거액의 돈을 받은 것은 사실인데 그 돈이 어디로
쓰여졌는지는 역사의 수수께끼입니다)  코민테른의 지시 명령에 따랐던 활동가들이 박헌영 김단야였지요.

그래서 그들은 오늘날 자유 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과 상관 없는 항일투쟁을 한 사람들입니다.

굳이 따진다면 그들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해야 할 정권은 북한이어야 하는데
북한은 김가왕조 우상화 놀음에 집중하느라 김가왕조 이외의 다른 독립운동가 세력들을 무시하고 깎아내리고 적대시 하더군요.
그것이 현실입니다.

아래는  펜앤드 마이크에서 올린 자료입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이 자료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대체적으로 그 흐름은 맞다고  생각합니다.

******************************

홍범도 장군의 유해 봉환에는 어떤 정치적, 사상적 함의가 있는 것인가. 문재인의 노림수는 무엇인가.

문재인이 카자흐스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개최에, 장군의 유해 봉환을 위해 보훈처장을 단장으로 한  특별사절단을 카자흐스탄에까지 직접 보내는 등 이토록 정성을 쏟는 이유는 무엇인가.

문재인이 존경하는 인물로 공산주의자 신영복과 모택동의 문화대혁명을 극찬한 리영희 교수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현충일 추념사에서 문재인은 6.25 전범 김원봉에게 '국군 창설의 뿌리'라고 칭송했다. 현충일 행사장에 참여한 6.25와 연평도 포격 전사자를 능멸하고 모독하는데도 주저하지 않았다.

일본 오사카에서 개최한 재일동포 만찬 간담회에서
문재인은 재일교포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복역한
서승(1945년생, 일본명 福田勝)에게 "존경하는 서승 선생님"이라며 재일간첩단 주범을 민주화 유공자라 부르고, 국가를 대표해서 사과한다는 발언을 했다. 서승은 1990년 3.1절 특사로 가석방 된 후 공작선을 타고 밀입북 한 후 일본으로 건너간 인물이다.

오사카에서 평창동계올림픽 개막식 전날 세계 각국의 귀빈들을 모신 만찬에서 '존경하는 사상가 신영복'을 소개했던 상황이 또 재연됐다.

공산주의자들에게 문재인은 어김없이 존경을 표하고, 존경하는 인물이라고 밝힌다.

2018년 베트남을 방문한 문재인은 베트남 전체를 공산화하기 위해 베트남전을 일으키고 이끌었던  호찌민에 대해 "호찌민은 베트남을 넘어 전 인류의 위대한 인물"라고 말했다.

올 초 문재인은 시진핑과의 통화에서 "중국공산당 창립 10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한다"라며 "중국의 국제 지위와 영향력이 날로 커지고 있으며, 두 번째 100년의 분투라는 목표 실현을 향해 중요한 발걸음을 내디뎠다"고 했다.

이 모든 문재인의 행적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리고 홍범도 장군의 유해 봉환은 이 궤적과 어떤 관련성이 있는가.

여기 홍범도 장군의 실제 행적을 추적한 글을 옮긴다.  문재인의 노림수가 무엇인지 가늠해 볼 자료이다. 긴 글이나 시간을 들여 읽을만한 귀한 자료이다.

- 자료(펜앤드마이크 게재)

<'독립군 학살 공모한 공산주의자' 홍범도 유해 대전현충원 임시안치>

1. 머슴의 아들, 게릴라전으로 일본군 공격

홍범도는 누구인가. 연합뉴스 보도에 의하면 홍범도는 “1920년 최진동 장군과 함께 독립군을 이끌고 봉오동 골짜기에서 일본 월강(越江)추격대와 독립투쟁 최초의 전면전을 벌여 무장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을 승리를 거둔 인물”(연합뉴스, 2021년 8월 12일)로 알려졌다. 과연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 속의 홍범도는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와 얼마나 부합하는 것일까? 이제부터 신화로 범벅이 된 홍범도가 아닌, 사료를 통해 홍범도의 실체를 추적해 본다.

머슴의 아들로 평양에서 태어난 홍범도는 15세 되던 1883년, 평양감영 나팔수로 군대와 인연을 맺는다. 평양에서 4년여 병졸 생활을 하던 중 같은 부대 소속의 부패한 장교와 시비 끝에 상관을 구타하고 탈영한다. 황해도 수안군의 종이 제조소에 숨어 일하던 중 주인을 때려눕히고 도주, 금강산 신계사에서 출가했다. 승려 생활 중 단양 이씨 성을 가진 비구니와 정분이 통해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는다. 비구니의 배가 불러와 더이상 숨길 수 없게 된 두 사람은 1892년 비구니의 고향인 북청에서 농사지으며 조용히 살기 위해 절을 떠났다.

홍범도는 개마고원에서 병졸 시절 배운 사격솜씨로 직업 포수로 성공한다. 그는 산포수 의병대를 조직하여 함경도 일대에서 게릴라전으로 일본군을 연파했다. 덕분에 함경도 주민들은 홍범도를 “총알로 바늘귀도 뚫는 사람”, “축지법을 구사하는 신출귀몰한 명장” 등으로 불렀다(장세윤, 『봉오동·청산리 전투의 영웅 홍범도』, 역사공간, 2017, 10쪽).

일본군의 추격으로 국내 활동이 어려워지자 연해주로 망명한 홍범도는 한인 대표기관인 권업회 부회장으로 활동했고, 러시아 볼셰비키당의 지원으로 조직된 이동휘의 한인사회당과 깊은 연계를 맺는다. 이때부터 공산주의 붉은 사조의 세례를 받았다는 뜻이다.

3·1운동 직후 홍범도는 연해주에서 대한독립군을 조직, 국경을 넘어 함경남도 혜산진의 일본군 수비대를 습격했다. 이것이 3·1운동 이후 독립군 최초의 국내 진입작전이었다. 9월에는 함남 갑산군의 금정 주재소와 일본 관공서를 습격했다. 10월에는 평북 만포진에 진입하여 일본군과 70여 명을 살상하여 국내 침공 작전 중 최대의 전과를 기록했다(장준익, 『북한인민군대사』, 서문당, 1991, 275쪽).

2. 봉오동·청산리대첩의 주역은 홍범도

홍범도는 1919년 8월 8일, 연해주 일대에서 모집한 대한독립군 106명을 인솔하여 간도로 이동한다. 홍범도는 최진동 부대와 연합하여 군무독군부를 결성한다. 1920년 5월 28일 안무의 국민회군까지 참여하여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軍督軍部)가 출범한다. 여기에 의군부·의민단·신민단이 합류했다. 대한북로독군부는 화룡현 봉오동에 근거지를 설치했다.

6월 7일, 봉오동 골짜기에서 홍범도가 지휘하는 독립군이 일본군을 매복 공격하여 한국 독립운동사에 찬연히 빛나는 승리를 거둔다. 상해 임정 발표에 의하면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은 전사 157명, 중상 200여 명, 경상 100여 명. 반면 독립군은 전사 4명(장교 1, 병사 3), 중상 2명에 불과했다. 그로부터 4개월 후인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홍범도와 김좌진이 이끄는 한국 독립군은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인다. 7일 밤낮에 걸쳐 벌어진 10차례 전투는 김삼웅의 표현에 의하면 한국 독립군의 10전 10승. 일본군 1,200여 명을 섬멸하고, 독립군은 사상자 150명에 불과했다. 이름하여 청산리대첩이다.

김삼웅은 봉오동·청산리 대첩을 통해 독립군은 식민지 시대의 굴종을 어느 정도나마 씻게 되었고, 한민족의 상무정신을 이으면서 향후 어떤 외적의 침략에도 맞설 수 있는 국민적 자존과 결기를 보여주었다고 평했다(김삼웅, 『홍범도 평전-대한독립군 총사령관』, 도서출판 레드우드, 2019, 179쪽).

3. 너무나 과장된 봉오동·청산리 전투 전과

그런데 국내외에서 봉오동·청산리 전투의 전과가 너무 심하게 과장된 것 아닌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사사키 하루다카(佐佐木春隆)는 1985년 발간한 『조선전쟁 전사로서의 한국독립운동의 연구(朝鮮戰爭前史としての韓國獨立運動の硏究)』에서 봉오동전투는 야스카와 추격대가 봉오동에서 독립군 24명을 사살하고 다수의 부상자를 내는 전과를 기록했으며, 일본군 피해는 전사자 1명뿐이었다고 주장했다. 청산리 일대에서는 일본군은 전사자 11명, 부상자 24명, 말 10필의 희생을 치렀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두 전투와 관련, 동북아역사재단의 신효승·장세윤 등도 우리 측은 전과를 너무 확대 과장했고, 일본 측은 패전을 감추기 위해 피해를 너무 축소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장세윤은 여러 자료를 토대로 봉오동전투에서 일본군 100여 명 살상, 청산리전투에선 일본군 400~500여 명이 살상되었으며, 우리 독립군도 그에 못지않은 피해를 본 것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장세윤, 『중국동북지역 민족운동과 한국현대사』, 명지사, 2005, 156쪽).

우리 독립군도 일본군 못지않은 피해를 본 것으로 봐야 한다는 장세윤의 연구 결과가 사실이라면 봉오동·청산리전투는 ‘대첩’이 아니라 ‘무승부’로 정정하는 것이 올바른 역사 인식 아닐까?
봉오동·청산리에서 격전을 벌인 일본군은 독립군 근거지를 말살하기 위해 북간도의 훈춘 · 왕청 · 화룡 · 연길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일본군은 한인 가옥을 불태우고 재산과 식량을 약탈했으며, 한인들을 보는 대로 학살했다. 이것이 경신(庚申)참변이다. 독립운동의 근거지였던 간도지역은 초토화되어 회복하기 힘든 타격을 입었다. 이후 만주를 무대로 하는 한인들의 항일무장투쟁은 현저히 퇴조했다.

4. 소비에트 정부와 비밀협약 체결한 이동휘

홍범도·김좌진을 비롯한 한국 독립군은 청산리전투 이후 각자도생하기 위해 일본군 포위망을 뚫고 뿔뿔이 흩어졌다. 이때 한인사회당 대표 이동휘가 “소규모로 분산된 한인 무장부대를 단일대오로 통합하면 레닌 정부가 도와주기로 했다”면서 “한국 독립군은 자유시로 모여라”라는 선전을 했다.
광복군 참모장을 지낸 김홍일의 증언에 의하면 간도의 한인 독립군들이 일본 토벌대에 쫓겨 러시아령으로 탈출했는데, 레닌 정부가 이들을 받아들여 전보다 한층 더 강력한 부대로 양성해주겠다고 약속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레닌이 구상하고 있는 인터내셔널 오트랴드(국제군)를 편성하는데 한국 독립군을 가담시키기로 약속했다고 한다(김홍일, 『대륙의 분노-노병의 회상기』, 문조사, 1972, 83~84쪽).

여기에는 무시무시한 흉계가 숨어 있었다. 이동휘의 한인사회당은 소비에트 정부로부터 금화 100만 루블이라는 천문학적인 자금을 지원받는 조건으로 모스크바에서 ‘대일한로공수동맹(對日韓露攻守同盟)’을 체결했다. 조건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공산주의를 수용하며, 만주와 연해주에서 활동 중인 한인 무장부대를 소비에트 적군 산하로 편입시킨다는 것이었다. 일본은 이 극비자료를 1920년 상하이에서 획득했고, 일본군의 간도 침략 과정에서 독립군으로부터 탈취했다. 비밀협약 관련 사항은 일본의 「오사카아사히신문(大阪朝日新聞)」 보도(1920년 10월 10일자)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신효승, 「20세기 초 국제 정세 변동과 한인 무장 독립운동」, 연세대 박사학위 논문, 2018, 188쪽).

그에 대한 대가로 레닌은 몇 차례에 걸쳐 100만 루블의 거액을 이동휘 측에 제공했다. 이것이 이른바 ‘코민테른 자금 사건’이다. 코민테른 자금을 수령한 이동휘와 한인사회당은 이후 일관되고 집요하게 임시정부 공산화 작업을 진행했다. 이동휘는 이승만의 친미 외교독립노선을 비판하면서 소비에트 러시아와 손잡고 임정을 한인사회당 계열이 장악하려고 시도했다(박종효, 『러시아 연방의 고려인 역사』, 도서출판 선인, 2018, 290~291쪽).
이동휘는 “대한이라는 낡은 이름을 버리고 ‘조선’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자”고 제안했으며, 태극기를 폐지하고 푸른 천에 세 개의 붉은 별이 있는 국기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마뜨베이 찌모피예비치 김 지음·이준형 옮김, 『일제하 극동시베리아의 한인 사회주의자들』, 역사비평사, 1990, 106쪽). 또 임정을 혁명위원회로 개편하고, 시베리아로 옮기려 했다.

이런 급진적 주장은 임정 내 민족주의 세력인 이동녕·신규식·이시영·안창호 등에게 거부당했다. 이동휘는 임시정부 개혁안을 국무회의에서 표결에 부쳐 처리하려 했으나 부결되자 1921년 1월 24일 국무총리직을 사임했다.

5. 이동휘에게 속아 자유시로 이동한 홍범도

임정을 탈퇴한 이동휘는 간도·연해주의 한인 무장부대를 시베리아 영내로 끌어들이는 작업을 진행했다. 뚜렷한 명분이나 이유 없이 부대를 이동시킬 수는 없는 일이므로 “간도와 연해주의 한인 무장부대를 통합하여 단일 지도부를 구성하자”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한인 무장부대의 집결지는 ‘자유시’로 선포된 아무르주의 스보보드니로 정해졌다.

소비에트 정부가 한국 독립군을 적군 산하로 편입시키기로 한 것은 일본과의 밀약 때문이다. 당시 7만 대군을 시베리아에 파병한 일본은 러시아 적백내전에서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백군을 지원했다. 일본은 시베리아 철군을 위해 소비에트 정부와 다롄(大連)·창춘(長春)회담에서 철군 조건으로 만주·연해주 일대의 한국 독립군에 대한 ‘처리’를 요구했다. 소비에트 정부는 이 요구를 수용한다.
홍범도를 비롯하여 자유시에 집결한 한인 무장부대 4,500여 명은 민족주의 성향, 공산주의 성향, 무정부주의 성향 등 잡다한 세력의 집합체였다. 이 무렵 시베리아 일대의 한인 공산주의 세력도 대한국민회의를 지지하는 이르쿠츠크파와, 이동휘를 지지하는 한인사회당파(상해파)로 분열되어 반목했다.

이 와중에 한인 무장부대가 자유시에 집결하자 공산주의자들은 이들을 서로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치열한 권력다툼을 벌였다. 그 결과 한인 무장부대는 이르쿠츠크파의 주장에 동조하여 적군 산하로 편입되어야 한다는 세력과, 그에 반대하는 세력으로 갈라졌다. 이르쿠츠크파 무장세력의 핵심은 자유대대였고, 상해파의 주력은 사할린부대였다.

사할린부대 편에 섰던 홍범도는 양파의 반목이 점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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