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위대한 이야기

다부동 전투(多富洞 戰鬪)☆ 전쟁 발발 1개월만에 북한군은 빠르 게 남하하여 불과 5주만인 1950년 8월 1일 낙동강 유역까지 도달했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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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부동 전투(多富洞 戰鬪)☆ 전쟁 발발 1개월만에 북한군은 빠르 게 남하하여 불과 5주만인 1950년 8월 1일 낙동강 유역까지 도달했다

동진대성 2020. 7. 15.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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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부동 전투(多富洞 戰鬪)☆

전쟁 발발 1개월만에 북한군은 빠르
게 남하하여 불과 5주만인 1950년
8월 1일 낙동강 유역까지 도달했다.
인민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넘어 대구와 부산을 점령하기 위해 8월공세를 벌였고, 대한민국 국군과 미8군은 최후의 보루인 낙동강 전선을 사수하기 위한 총력 방어전을 펼쳤다.

8월 3일부터 인천상륙작전 직전인
9월18일까지 한달 반 동안 낙동강 전선에서 벌어진 이 치열한 공방전을
"낙동강 방어선 전투"라 한다.낙동강 전선은 칠곡을 기준으로 북쪽 방어선은 국군 1사단, 6사단, 7사단, 8사단, 수도사단, 3사단이 방어를 맡았고, 칠곡 이남 서쪽 방어선은 미군 24사단, 2사단, 25사단, 해병대 1대대, 1기병사단이 방어를 맡았다.

백선엽의 국군 1사단은 낙동강 전선 중에서 칠곡을 중심으로 한 전선의 방어를 담당했는데, 북쪽 방어선과 서쪽 방어선이 만나는 모서리에 있고 대구를 방어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낙동강 전선에서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곳이었다.당시 대구에는 대한민국 정부,육군본부, 미8군사령부가 위치해 있었다.

북한군은 대구를 점령하기 위해 인민군 제3사단, 제13사단, 그리고 제1사단의 1개 연대를 동원해 칠곡 전선을 방어하는 국군1사단을 집요하게 맹공격했고, 1사단은 북한군 3개사단의
총공세를 방어하기 위해 죽기살기로 총력 방어전을 펼쳤다.칠곡 인근 낙동강 전선에서 8월 한달에 걸쳐 벌어진 일련의 전투를 다부동 전투라고 하며,낙동강 방어선 전투중에서 가장
치열했고,나아가 6.25전쟁 전체에서도
가장 치열했던 전투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백선엽의 국군 1사단이 다부통 전투
에서 북한군을 저지하는데 실패했더라면 대구를 내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1사단을 중심으로한 국군은 미8군의 도움을 받아 큰 희생을 감수하면서 이곳을 지켜내는데 성공했다.

8월 3일 국군 1사단이 낙동강을 도하 하자마자 해평리에서의 전투를 시작으로 북한군과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어졌다.

8월 8일~9일 북한군의 T-34 전차 15대가 낙동강을 도하하여 인근의 고지를 잇달아 함략하여 위기를 맞았다.그러나 미 공군의 도움과 대전차 특공조의 활약으로 북한군의 전차를 잇달아 파괴했다.결국 북한군은 전차의
대부분을 상실했다. 전차를 상실한 북한군은 전술을 바꾸어 1사단의 우측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이에 육군본부는 1사단에게 다부
동으로 이동하여 'Y'선을 사수하라고
명령했다.하지만 1사단이 다부동에
도착했을 때 인근 전략적 유충지인
수암산과 유학산(遊鶴山: 839m)이 이미 북한군에게 점령당한 상태였다. 1사단은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전략적 요충지인 유학산을 탈환해야만 했고 고지 탈환을 위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김일성은 광복절에 대한민국 정부가
위치해 있는 대구를 점령하라고 독전
했고 이에 북한군은 8월 15일 광복절
을 기해 칠곡(다부동)에 총공세를 가했다. 이에 칠곡을 중심으로 낙동강
전선에서 격전이 펼쳐졌다.그러나 1사단 좌익의 미군 1기병사단이 방어하던 왜관 북쪽 2km의 303고지가 피탈되며 왜관이 적진에 떨어지고 말았다. 또 1사단 우익의 6사단도 4km 후퇴하며 1사단 홀로 북한군 3개 사단과 맞서 싸우며 전선을 사수하고 있는 절박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1사단마저 무너지면 그길로 대구는 북한군의 손에 떨어질 운명에 처했다.

북한군이 다부동에 총공세를 펼치자
8월 16일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오키나와에서 B-29를 98대나 출격시켜 왜관에 융단폭격을 가했다. 하지만 미군의 융단폭격에도 불구하고 북한군의 총공세는 이어졌다. 1사단 홀로 북한군 3개 사단의 총공세를 저지하고 있는 중과부적의 위기 상황은 이어졌고, 8월 17일 미8군은 미 제25사단 제27연대를 다부동에 증원군으로 투입하였다.

8월 18일 북한군이 지척인 가산까지
침투했고, 북한군의 포탄이 대구 시내
까지 떨어졌다. 이 충격으로 정부는
대구에서 부산으로 이동했고 대구 시민들은 충격과 혼란에 빠졌으나 조병옥 내무부 장관이 직접 경찰과 함께 가두에 나서 대구 민심을 수습하여 질서가 회복되었다.

8월 18일 국군 1사단은 미 27연대와
함께 적진돌파작전을 전개했다. 주야간을 가리지 않고 격전이 펼쳐지며 엄청난 사상자가 속출했으며 칠곡 일대의 고지들을 뺐고 빼았기는 일진일퇴
의 격전이 계속되었다.격전이 계속되며 다부동의 전황은 위급해졌다.

8월 19일 종심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미 23연대가 두모동에 합류했고, 같은날 육군본부에서도 국군 8사단 제10연대를 다부동에 투입시켰다

8월 20일 미 27연대가 국군 11연대 1대대가 후퇴 중이라며 퇴로 확보를 위해 자신들도 철수하겠다는 통보가
오자 백선엽은 직접 현장으로 달려가
병력을 수습하고 2대대 선두에 서서
돌격, 488고지를 탈환했다.

이 전투에서 백선엽은 권총을 들고 병사들과 선봉에 서서 적진으로 돌격
했는데,국내외적으로 사례를 찾기
힘든 희귀한 사례 중의 하나. 일단 이
행동과 비슷한 사례로는 이오지마 전투 당시 일본군 수비대 최후의 돌격을 직접 이끈 쿠리바야시 타다미치 중장, 6.25 전쟁 당시 인천 상륙작전 중 손원일 제독이 직접 소총을 들고 대한민국 해병대와 함께 진격한 경우나 시어도어 루스벨트 3세 준장이 노르망디 상륙을 최전선에서 함께 했던 것 정도
였다.

백선엽장군은 돌격직전 병사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모두들 앉아 내 말을 들어라.그동안 잘 싸워주어 고맙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더 후퇴할 장소가 없다.더 밀
리면 곧 망국이다. 우리가 더 갈 곳은
바다밖에 없다.저 미군을 보라.미군
은 우리를 믿고 싸우고 있는데 우리가 후퇴하다니 무슨 꼴이냐. 대한 남아로서 다시 싸우자.내가 선두에 서서 돌격하겠다. 내가 후퇴하면 너희들이 나를 쏴라."

8월 20일밤 이후 북한군의 전력 소모
가 커졌는지, 북한군의 공세가 약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8월 21일밤 북한은 다시 한번 역습을 감행했다. 이에 6.25전쟁 사상 최초의 전차전이 벌어졌다.국군 1사단과 미 27연대는 모든 자원을 투입하여 5시간 동안 총력전을 펼친 끝에 결국 북한군을 격퇴하는데 성공했다.북한군은 전차 9대를 잃고 1300여명의 전사자를 내고 패퇴했다.막대한
사상자가 발생한 북한군은 이후 수세
에 몰리게 된다.

8월 23일 귀순한 북한군 장교로부터
입수한 지도를 바탕으로 미군이 적진에 폭격을 가해 북한군에 큰 타격을
주었다. 8월 24일 1사단은 다부동 인
근의 대부분의 고지를 점령했다.

다부동 전투에서 백선엽이 이끄는 국
군 제1사단은 25일간에 걸친 북한군 주력 3개 사단의 집요한 공세를 저지하고 낙동강 전선과 대구를 사수하는데 성공했다.다부동 전투에서 장교
56명을 포함, 2300명의 전사자를 낸 것으로 집계되었다.여기에 포함된 전사자 외에 군번도 없이 긴급하게 투입된 수많은 학도병들, 그리고 나이가 많아 입영대신 노무자로 편성되어 전선에서 탄약보급과 식량보급을 담당한 노무자들의 희생도
많았다.

미군은 이전까지 한국군을 북한군만
보면 도망가기에 바쁜 군대라 여기며 한국군을 극도로 불신하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다부동 전투에서 1사단이 절대 열세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한달동안 막대한 희생을 감내하면서 끝내 다부동 전선을 지켜내는 모습을 보고 한국군에 대한 인식을 달리하게 되었다고 한다.

8월 공세를 저지한 후, 8월 28일 1사단은 부산에 상륙한 미 1기병 사단에 다부동을 이양하고 팔공산으로 이동하여 전력 재건을 했다.그러나 9월 미 1기병사단이 북한군의 공격에 주저항선이 붕괴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곧이어 인천 상륙작전이 실시되어 북한군에 막대한 혼란이 벌어지자, 반격부대로서 다시 1사단을 지휘해 다부동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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