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위대한 이야기
김원웅 광복회장, 국부 이승만을 토착왜구로 소환하나? 8.15 광복절 경축식 기념사에서 김원웅 광복회장 본문
[김정기의 직필직설] 김원웅 광복회장, 국부 이승만을 토착왜구로 소환하나?
8.15 광복절 경축식 기념사에서 김원웅 광복회장이 집권 초기에 기념사 정치를 하며 대한민국을 분열시키는 주범이었던 문재인을 대신하여 대한민국 국민을 독립군과 친일파로 분열시키는 과도한 발언을 했다. 광복은 암흑기였던 일제 강점기로부터 광명을 찾은 날로 보통 해방일 liberation day이라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서 해방을 맞이한 건 한민족 모두의 축제일이어야 할텐데, 중립의 의무가 있는 광복회장이 온국민을 독립군과 토착왜구라는 프레임을 씌우며 광폭행보를 하고 있다. 이 시기에 왜 그랬을까? 가짜 평화쇼, 소득주도성장, 즉 소주성 정책 실패, 검찰 무력화에 대한 집단 반발, 집값 폭등 등 부동산 정책 실패로 문재인과 민주당의 지지율이 바닥치고 있는 데 대한 불안에서 새로운 전선을 만들려고 하는 걸까? 만일에 그렇다면 꿈깨라이다. 국민들이 이런 프레임에는 오히려 피로감이 누적되어 있어 반전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울 거다.
김원웅은 "이승만이 반민특위를 폭력적으로 해체시키고 친일파와 결탁했다. 대한민국은 민족반역자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유일한 나라가 되었고 청산하지 못한 역사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미국의 조지 워싱턴, 프랑스의 드골, 인도의 간디, 베트남의 호치민, 이들은 그 나라의 화폐 속에 있는 독립운동가들이다"라며 "전 세계에서 화폐 속의 인물에 독립운동가가 없는 나라는 대한민국 한 나라뿐이다"라고 꼬집었다.
그의 말이 과연 진실일까? 국부 이승만을 이런 식으로 폄훼해서는 안된다. 이승만은 대표적인 독립운동가가 아니었던가? 1904년 한성감옥 출옥 후 고종의 특사로서 카쓰라 태프트 밀약을 저지시키기 위해 항일 애국 미션을 수행차 방미했고,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국제정치학 박사가 된 후 하와이에 정착하여 미국 정계와 국제 사회를 대상으로 일제의 학정과 조선의 독립을 외쳤고, 1919년 3.1운동 후 상해에서 출범한 통합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됐고, 1945년 해방정국에서는 당연히 지도자로 등극하는 상황이었다. 이승만은 대통령으로서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초기에 일본과의 외교에서는 평화선을 선포하여 독도를 한국 영토에 편입시켰고, 대일 청구권 협상에서 강경 노선을 굽히지 않으며 적극적인 반일외교를 했다. 즉, 이승만이 한 번도 친일파가 되어 본 적이 없다는 거다. 다만, 오랜 해외에서의 독립운동으로 국내 기반이 취약하고, 여전히 일본의 항복을 받아낸 미국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이승만이 공산세력을 저지하기 위해 친일세력과 손을 잡은 것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 1945--48 시기에 남한에서 미군정이 실시되었는데, 군정장관 하지 중장은 소련의 사주를 받은 공산세력에 대항할 세력으로 친일파를 활용하기로 했고, 그래서 친일파의 청산은 미국의 국익과 배치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논리로 미군정은 일제강점기의 통치구조를 부활시키고 친일파를 대거 등용했다. 1948 남한 단독으로 출범한 대한민국의 이승만 대통령도 미군정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았고, 친일파는 이승만의 정권 유지에 핵심적 역할을 했다. 또 이를 위하여 이승만은 반민특위의 활동을 방해하고 무력화시켰다. 그 결과 친일파 청산에 대한 국민적 지지에도 불구하고 반민특위의 활동은 실패했다. 그렇다고, 이승만이 친일파가 되는 건 아니지 않는가? 다시 말하면 친일파를 중용한 것과 친일파는 완전히 별개의 문제라는 거다.
사실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시기로 가면 만주 인근지역에서 무장 게릴라 투쟁하던 김일성 조차도 소련 극동군 대위로 들어갔고, 그밖의 독립투사들도 중국 팔로군에 편입되었으므로 사실상 무장 항일투쟁은 전무했다. 또한 식민지 조선이나 일본 괸동군이 지배하는 만주국에서 살아가는 조선인들이 전체 인구의 99.99% 이상인 점을 감안하면, 전시 동원체제에서 적극적 친일파이거나 아니면 소극적 친일파로 분류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냉정한 의미에서 친일의 프레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그나마 미국 하와이에 있었던 이승만과 중국의 충칭에 있었던 김구를 비롯한 수 백명의 독립운동가만이 완전 자유로울 수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아주 악질적인 친일파를 제외하고는 서로 돌던지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당시 일본은 동아시아 질서를 사실상 지배하고 있는 유일 강대국이었기 때문에 조선 독립의 꿈은 요원했고, 이런 상황에서 적자가 되기 위한 노력을 하는 과정에서 소극적 친일을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어쩌면 이게 식민지 조선인으로서 숙명이었을 거다.
어쨌든, 이승만이 태생적인 한계로 친일파 청산에는 실패했지만, 이 땅에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이식시키고, 한미동맹 체제를 구축하는 등 국부로서 공화국의 기초를 다지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즉, 공이 과를 훨씬 능가한다는 거다. 한국인들은 지도자들에게 신을 기대하지만, 지도자도 인간이다. 왜 선진국에서 지도자를 평가할 때 공칠과삼으로 하면서 역사 속에서 사표가 될 수 있는 지도자들을 만들어내는 지
아는가? 따라서 이제는 한국도 선진국형 방식을 따랐으면 한다.
김원웅은 워싱턴, 드골, 간디, 호치민이 화폐 속에 들어갔는데, 우리나라는 화폐 속의 인물에 독립운동가들이 들어가지 않았다고 했다. 언급한 4인은 각기 독립운동을 이끌었고, 그 결과로 정권을 수립하여 초대 국가수반이 된 지도자들이다. 독립운동가로서가 아니라 국가 최고지도자로서 화폐 속에 들어갔다. 한국도 마찬가지로 이승만이 독립운동가 출신 초대 대통령으로 화폐 속에 들어갔다. 아마도 김구나 그가 존경한다는 김원봉을 염두에 둔 것 같은데 두 사람은 독립운동가는 맞지만 제대로 된 정부의 최고지도자 조건에는 부합하지 않는다.
도대체, 김원웅이 누구길래 이렇게까지 할까? 독립군과 친일파 프레임 전쟁을 자주 한 문재인과 닮은 꼴 아닌가? 문재인도 그의 아버지가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의 통제를 받는 함흥시청 농업계장 출신으로 적극적 친일분자였기에 문재인의 독립군에 대한 콤플렉스가 오히려 역설적이지만 본인이 독립군이라는 착각을 하게 하면서 야단법석을 떤 게 아니었을까? 마찬가지로 김원웅도 집안 내력이 있었을까? 그는 일제시대인 1944년 중국 충칭에서 태어났다. 당시 충칭은 사람이 모이는 곳이었다. 일본군의 추격을 받아 중국 국민당 장제스가 내륙인 충칭을 임시수도로 정했기 때문이다. 김구가 이끌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국민당군의 퇴로를 따라 여러 도시를 전전하다가 장제스의 도움으로 1941년에 충칭에 자리잡고, 국민당과 공산당이 국공합작하여 항일전쟁하듯이 좌우통합정부를 구성하게 된다. 1942년에 김원봉이 이끌던 조선의용대도 광복군 제1지대로 참여하게 된다. 김원웅의 아버지
김근수도 김원봉이 창설한 조선의열단에 1935년에 가입했다고 하나, 사실 조선의열단은 1935년에 해산했고, 이후 김원봉의 조직에 이름이 없어서 확인할 수도 없다. 김원봉과 함께한 게 사실이라면, 1942년 김원봉이 광복군에 합류했으니까 광복군 명단에 있어야 하는 게 당연할 거다. 어쨌든, 김원웅이 1944년 충칭생인 거로 보면 함께한 것으로 추정된다. 어쨌든, 김원웅의 아버지가 독립운동 변방에라도 있었다면, 김원웅메게는 문재인과는 다른 형태의 콤플렉스로 작용할 수도 있다고 본다. 핵심부가 아니라 주변부 무명 연락원의 후예로서 더욱 더 설쳐대는 것 등등 말이다.
김원웅의 정치 행적을 보면 전형적인 철새 정치인의 그것이다. 서울대 정치학과에 들어가서 한일협정 반대 시위한 것까지는 이해가 되지만, 1972년 졸업 후 유신체제를 받치던 집권여당인 민주공화당에 당료로 입사를 하고, 전두환 군부정권이 들어섰을 때는 민정당으로 옮겨 당료 생활을 계속한 건 상당히 모순적이다. 그도 그런 것이 이승만을 친일세력과 야합했다고 비난하는 사람이 연장선상에서 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지는 전통적 기득권 세력이 득실하는 정당에 국회의원도 아닌 당료 생활을 20여 년간 했는지 이해가 안 가는게 나만 그럴까? 그리고는, 1992년 3당 합당에 반대하여 진보 정당인 민주당으로 출마하여 국회의원이 되고, 또 2000년에는 보수 정당인 한나라당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이후에는 유시민과 함께 개혁신당을 하다가 2004년에는 열린우리당으로 국회의원에 당선이 되는 등 알 수 없는 철새 정치인 행보를 했다. 그러다가 정계 은퇴 선언을 하고, 최근에 광복회장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됐다. 이후 초강성 발언을 이어가고 있다. 그의 정치 인생을 보면 이런 과도한 발언도 정권에 잘 보이기 위한 생존 투쟁같아서 서글퍼기 짝이 없다. 나이 77세로 본인의 얼굴에는 책임져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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